점찰법회(占察法會)란 한마디로 ‘점을쳐서 살펴 알아보는 것을 행하는 법회’라는 뜻이다. 여기서 점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동양에서 8괘(八卦), 육효(六爻), 오행등의 특정한 방법으로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일 -민중서관 국어대사전-’로 묘사고 되고 있다. 이단어만 놓고 본다면 점찰을 그러한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점찰법회에서의 ‘점’이란 개념을 생각할 때 일단 그러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점찰에서의 점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개념과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점찰에서 점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두고 이것을 수준이 낮은 수준의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착각이다. 수년간 점찰을 수행해오면서 느낀 것은 이것만큼 수승한 법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점찰은 결코 낮은 수준의 불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이 아니라 참회와 계율 등을 바탕으로 불보살과 법, 승가에 대한 강한 신심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것임을 알았다.
여기서 ‘점(占)'이란 무엇인가를 예상, 추론하는 것을 말하고 ’찰(察)'은 살핀 다는 것인데 무엇을 그리 예상해보고 살펴보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지장보살께서는 점찰경 상권 견정신 보살과의 대담에서 어떤 사람들이 점찰이 필요한가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다.

“선남자여 자세히 들으소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연설하겠나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멸하신 뒤의 악한 세상 가운데에 여러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있어 세간 출세간의 인과법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믿음을 얻지 못하면 무상(無相)한 생각,괴로움이라는 생각, 나가 없다는 생각,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을 능히 닦아 배워 현전에서 성취하지 못하며 능히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법과 십이인연의 법을 부지런히 관하지 못하나이다. 또한 진여실제와 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등의 법을 부지런히 관하지 못하나이다. 이와 같은 법을 부지런히 관하지 못하는 연고로써 필경에 능히 이르지 못하며, 십악의 근본허물의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삼보의 공덕 가지가지 경계에서 능히 전일하게 믿지 못하여, 삼승 가운데에서 모두가 일정한 방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등의 사람은 만약 가지가지의 여러 장애 되는 일이 있으면 근심하고 염려함을 증장하여 혹은 의심하고, 혹은 뉘우쳐 일체의 처소에서 마음이 명료하지 않나니, 다분히 여러 뇌고로움을 구하여 많은 일에 얽혀 잡혀서 짓는바가 정한바가 없으니 생각은 근심하고 혼란스러우며 도업을 닦는바를 그만두게 되나이다.”

-점찰경 상권-

여기에서 지장보살께서는 점찰이 행해질 시점으로 ‘만약 부처님께서 멸하신 뒤의 악한 세상 가운데’라는 것으로 설정하셨고, 그 대상으로는 그 시대를 사는‘여러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로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특히 그들 가운데 ‘세간 출세간의 인과법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믿음을 얻지 못하여 가지가지의 여러 장애 되는 일이 있으면 근심하고 염려하며 의심하고, 혹은 뉘우쳐 일체의 처소에서 마음이 명료하지 않고 다분히 여러 뇌고로움을 구하여 많은 일에 얽혀 잡혀서 짓는바가 정한바가 없어 생각이 근심하고 혼란스러운 사람들’, 그래서 결국은 ‘도업을 닦는바를 그만두게 되는 사람들’이 점찰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줄여 표현하면 부처님이 멸하신 뒤 악한 세상에서 부처님의 길을 닦는 출가, 재가자들이 생각이나 신체적, 환경적으로 수행하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그러한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도업에서 멀어지게 되는데(요즘 말로 표현하면 환속하거나 개종하게 된다는 뜻) 그것을 점찰을 통해 예방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점찰은 정말 그렇게 예방이 가능한가? 답은 ‘진심으로 하면 가능하다’이다. 그 이유는 일단 우리는 혜안이 열리기 전에는 한 치 앞도 알지 못한다.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눈앞에 종이 한 장을 가려놓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면 알 수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이 부족한 우리들이기에 모든 것은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 이시대의 고승 가운데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될까? 고승 들 뿐 아리나 여타의 종교를 비롯한 거의 대분분의 종교지도자들의 삶들은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때 점찰법은 하나의 해법을 제시해 준다. 점찰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먼저 불보살에 대해(특히 지장보살) 깊은 심심으로 예배하고 칭념한 다음 점찰을 통하여 답답한 것에 대해 답을 구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을 사회에 퍼져 있는 점치는 법과 유사한 방법을 채택했고 그래서 점이라는 표현이 들어갔고 ‘점찰(占察)’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우리가 이시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점등을 점이라 부르지 않고 ‘복서(卜筮)’라 하여 분리하여 놓아 시비를 차단시키고 경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만약 부처님의 제자가 다만 마땅히 이와 같은 상법을 학습하고 지심으로 귀의하면 관하는 바의 일이 진실로 자세함이 없지 아니합니다. 응당 이와 같은 법을 버리어 없애고 도리어 세간의 복서(卜筮:길 흉을 알기 위하여 치는 점치는 법)의 가지가지 점상을 쫓아 길흉등의 일에 탐착하고 즐거이 익힌 것을 따라가거나 혹 즐겨 익히는 자는 깊이 성스러운 도를 장애할 것입니다.”

-점찰경 상권-

이렇게 구분지어 놓고 있는 것을 놓고 보면 경전이 등장하는 시기의 ‘점(占)’의 개념은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점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나 해석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찰의 법은 과거 신라와 고려때에 크게 성행하다가 중간에 역사가 단절된체 이시대 까지 왔다. 그러나 요즘 다시 지장신앙이 되살아나면서 여기저기서 점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수행하고 있는데 아직 본격적인 바람이 불고 있지는 않다. 실재 현장에서 오랫동안 점찰을 해 본 결과 사전준비나 중간 관리 등에 있어서 어떤 정형화된 방법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장행자들이 하루속히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찰경에 의지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유사한 방법으로 그 명맥은 꾸준하게 유지되어 왔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를 이끌고 계시는 큰스님중의 한 분은 출가하시고 어느 정도 이력을 쌓으신 후 당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셨다 한다. 그 어른은 선·교·율의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크게 고민하셨는데 이 때 이어른이 해법으로 택하신 것은 불보살에 의한 선택이었다. 즉 당신의 길을 불보살에게 여쭈어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스님은 기도를 시작하셨고 기도 회향일에 항아리에 여러 가야할 길을 적은 쪽지를 넣고 하나를 뽑으셨다 한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경(經)’이었는데 이후 그 어른은 지금 까지 한 길을 걷고 계시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고 한국불교에 큰업적을 남겨 후학들의 귀감이 되시고 계신다.
위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점찰의 방법과 의미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물론 그어른께서 이런 점찰을 아시고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궤를 같이 하고 계신다.
이시대 이방법 만큼 좋은 방법이 있을까? 본인의 길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그런 방법을 택했다고 탓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불교의 기본인 ‘인과법(因果法)’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인과법에 의하면 사람마다 다 닦은 길이 달라 오늘에 이르렀고 옛것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닦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시대 우리들은 그런 인과를 꿰뚫어 알 수 있는 능력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는 사기꾼이다.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솔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스스로 오리무중에 쌓여 있으면서 남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답답한 우리들이 택할 길은 스스로 열심히 수행해서 길을 찾아 가거나 불보살의 위신력을 받아 길을 찾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스스로도 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를 깨우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어쩌면 그것 자체가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하고 그만큼 늦어질 위험이 있다. 마치 자신의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 스스로 생각하여 깨우친 후 결정하는 것과 많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선배나 선생님을 통해 조언을 구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가 반드시 쉬운 길은 아니다. 후자를 택하였을 경우 지극 정성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를 들은 큰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셨고 점찰에서도 그러한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점찰경에서는 위에서 예를 들은 그런 사람들. 즉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도업에서 물러날 수 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그를 극복할 단서를 제시한다.

경전에 보면

“그 륜의 상은 3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나니 무엇 등이 셋이 되는가 하면, 첫 번째 륜상은 능히 숙세의 지은바 선악업의 종류의 차별을 보이는 것으로 그 륜은 열이 있습니다. 두 번째 륜상은 능히 숙세의 집합된 업이 오래고 가까움, 지은바의 강하고 약함, 크고 작음 등의 차별을 보이는 것이며 그 륜은 셋이 있습니다. 세번째의 륜상은 능히 삼세 가운데의 보를 받는 차별을 보이나니 그륜에는 여섯이 있습니다.”

-점찰경 상권-

이와 같은데 첫 번째는 먼저 나는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고, 둘 째는 그것들의 경중 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며, 세 번째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답답한 것들에 대해 해답을 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